
사사기 6:11-14 / 사도행전 9:32-40
신약 본문은 사도 베드로가 일으킨 두 가지 이적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팔년 동안이나 중풍 병으로 누워있는 애니아를 고치는 이적이고, 또 하나는 병들어 죽은 여인 다비다를 다시 살리신 이적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 하나가 병자를 치유해 주는 사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은 후에도 병든 자를 치유하는 역사는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본문에 기록된 두 가지 연이은 치유 사건에서 공통으로 사용된 단어가 “일어나라.” 하는 단어입니다. 애니아라는 8년 된 중풍 병자를 보고 베드로는 “애니아여, ‘일어나서,’ 자리를 정돈하시오.” 이 사건은 마태복음 9장에서 중풍 병자를 보고 예수님이 “일어나서, 네 침상을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한 사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일으킨 치유 사역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자인 베드로를 통해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에게 일어나라고 하는 말은 반드시 의학적으로 완쾌를 얻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접촉점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질병이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은 쇠약해지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언제나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질병보다 더 무서운 사건은 죽음입니다. 또 하나 이적 주인공인 다비다라는 여인은 질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남편 없는 이 여인이 초대 교회에 출석해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그만 질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기별합니다. 장례를 집행해 달라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도착한 베드로는 시신 옆에서 기도한 후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이 말에 죽은 다비다가 눈을 뜨게 되었고, 살아난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도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린 장면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말합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한 번 죽습니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의 눈으로 보면 부활의 하나님, 산자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다시 살리십니다. 성경은 죽음이 인간을 지배할 수 없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실존론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살아 있는 것 같아 바삐 움직이지만, 사실은 삶에 지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힘들어 누워있고, 낙심해서 기죽어 있는 사람들, 삶의 크고 작은 문제에 시달리는 성도들을 향하여 베드로는 외칩니다. “일어나세요. 그리고 다시 시작해 보세요.”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향해 ‘일어나라’고 외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삶의 문제로 걱정과 근심과 슬픔이 밀려올 때 예수님에게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일렁이는 고뇌와 고통, 마음속의 풍랑과 파도에 흔들리지 말고 예수님에게로 마음을 모아보시기 바랍니다. 힘들어서 기를 펴지 못하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일어나라’고 간절히 외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청년이여 일어나세요.’ ‘집사님 일어나세요.’ ‘권사님 일어나세요.’ ‘장로님 일어나세요.’ 예수님이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다비다처럼 일어나는 역사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현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베드로의 역할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일어나라’고 외치는 역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며 동시에 베드로처럼 지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담대하게 외치는 존재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주변을 한 번 관심 있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풀이 죽어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눌려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죽고, 눌려서 살아가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일어나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말로도 외치기도 하지만, 기죽어 있는 사람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손 내밀어서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쳐진 어깨를 부축해 주고,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도 일어나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의 가슴속에는 “일어나라”라고 외치는 성령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일어나라”라고 속삭이는 성령의 희망찬 음성을 듣고 어둠에서 일어나 밝은 빛을 향하여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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